나무의 안과 밖

IMG_1265
작가는 나무의 내부를 조심스레 절개한다. 드러난 내부는 외피와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안과 밖이 공존하는 풍경이다. 나무의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결국은 한 몸이긴 하지만 우리의 눈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언제나 내부는 비밀스럽고 모호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그러나 단단하고 완강한 껍질 안에 자리한 생명과 에너지와 모종의 힘들은 나무를 뚫고 나와 줄기와 꽃들을 피워낸다. 줄기나 꽃 역시 나무의 몸통 그 자체이고 그것 역시도 대지의 살에서 분리되지 않은 것임을 깨달으면 그 모든 모습은 경이롭다. 내가 보는 나무와 꽃은 결국 흙이다. 아름답고 화사한 꽃의 연약한 잎사귀와 화려한 색채가 결국 나무의 내부, 흙에서 나왔던 것이다. 나의 몸 역시 어머니의 내부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한때 어머니의 몸이었고 10개월 동안 여자였다가 자궁 밖으로 나왔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모두 누군가의 내부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토록 단단한 물질에 구멍을 내고 세상 밖으로, 태양 아래로 몰려나오게 하는 생명의 힘과 기운이 마냥 신비롭다. 생명은 이렇게 팝콘처럼 부풀어 오르다 터져 나온다. 그런가하면 우리들 생각과 감정이란 것도 저 내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밖으로 외화 되어 나오는 것 같다. 아득한 깊이를 가진 것들만이 생명을 틔운다.
차종례는 그렇게 발아하고 융기한 생명에너지의 흔적을 형상화했다. 아울러 감정과 사고의 자연스런 돌기를 표현했다. 작가가 다루는 ‘옐로시다’라는 목재는 그만큼 무르고 부드러워 비교적 자유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재질을 지녔으며 무척 예민해서 작가의 체질과도 맞는다고 한다. 옐로시다의 내부를 하염없이 파고들어가 어루만지고 가다듬어 작은 융기들의 바다를 이루어놓았다. 오랜 시간 나무와 함께 한 육체에 이끌려나온 뾰족한 가시, 침 같은 것들은 결국 작가 자신의 몸과 살, 감정과 기억, 말과 언어들인 셈이다.
단호하고 밋밋한 나무는 촉각을 자극하는 기이한 존재로 변신했다. 시각보다는 촉각성을 유인하고 불러들이는 표면은 텅 빈 혹은 아무것도 없는, 그저 질료로만 채워진 내부를 공격적이고 불안하며 의미를 내장한, 수없이 많은 사유의 굴곡과 주름들로 채워 넣었다. 나무가 또 다른 특정 존재로 탈바꿈하거나 그 무엇인가를 재현하는데 바쳐지지 않고 전적으로 나무의 내부가 응하고 요청하고 그렇게 다가오는 불가피한 접촉, 만남을 드러냈다. 순간 나무의 피부는 촉각적인 기이한 풍경으로 돌변했다. 반듯한 표피는 수많은 돌기들로, 수직의 침으로, 빼꼭하게 피어난 가시로 바뀌었다. 익숙한 나무가 너무나 낯설게 다가온다. 이것은 무척 초현실적인 수법과 장치에 다름 아니다. 그 위에 여성적인 감성과 감각이 그림자 되어 드리워졌다.
나무의 속살은 작고 싱싱한 새싹과 산의 형상을 닮은 체 수직으로 부풀어 오른다. 선인장의 가시 같기도 하고 대지를 움트고 삐져나오는 식물의 새싹과 줄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모든 살아있는 세포들은 한결같이 막을 뚫고 밖으로 머리를 내밀 듯이 움튼다. 안과 밖의 경계가 트이고 구멍이 뚫릴 때 새로운 생명과 탄생, 성장이 가능하다. 그것들은 뿔처럼, 침처럼 솟아올랐다. 하나의 정점으로 몰리고 일정한 시간의 경과를 극단으로 밀어 올리다 응고된 자취다. 그것들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는다. 첨탑으로 치솟은 성당의 외관이 하늘에 가닿고자 한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듯이, 지상계를 떠나 저 천상계를 강렬히 열망하던 종교적 바람과 희구의 시선이 이룬 것이 탑이고 충족되지 않는 물질적 욕망의 구현이 마천루였듯이 수직으로 상승한 뿔과 침의 형상은 그 같은 욕망과 기원, 소망과 유토피아 등을 아우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차종례가 만진 나무는 모두 뾰족한 형상으로 솟아있다. 나무의 피부에 수많은 융기들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보는 이의 시선이 공중으로 부양되어 내려다보는 형국이 연출된다. 작품들은 대지의 수평성에 따라 바닥에 놓여지거나 매달려있거나 벽에 걸리고 기둥처럼 쌓여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펼쳐진 대지이자 어지러이 연결된 산맥들을 조감하게 한다. 아니면 황량한 사막이나 백사장에 미묘한 파문이 일어나는 장면도 슬그머니 연상된다. 내려다볼 때 그런 느낌은 더욱 고양된다. 직립의 시선이 아닌 하늘의 시선, 정면이 아닌 측면의 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를 종래와는 다르게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 나무는 마치 자신의 몸으로 스스로를 증거하듯, 상처를 보여주듯, 자신의 기억과 사연들을 전적으로 발설하듯 솟아있다. 수 없는 시간의 경과를 안쪽으로 깊이 있게 저장하고 있는 나무의 속살은 자기 내부를 바닥에서 정점까지 보여준다. 그것은 조용한 수직의 힘이고 자기 내부의 모든 것을 뾰족하게 밀어 올린 한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나무의 표면에 드리운 자연의 호흡들은 내밀하고 조심스러우며 무척이나 명상적이다. 작고 뾰족한 뿔의 형태, 가시나 침과 같은 흔적은 매일 매일 나무라는 존재, 재료와 함께 보낸 시간의 기록이자 그때그때마다 일어나는 감정과 사유의 흔적들이고 기록이다. 이 작가는 나무의 살에 자연과의 깊고 섬세한 교호를 부감 시키고 자기 감정의 내밀한 결을 쪼아댔다.
이전 작품의 제목이 대부분 ‘새벽’, ‘안개’, ‘산’ 등이었던 것은 작가와 자연과의 대화와 만남에서 가능한 체득이자 그것과의 긴밀한 영성으로 인해 비롯된 자취들이다. 근작 역시 그런 자취가 여전하다. 반면 단순화되고 전반적으로 구체성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나무의 속살에 드리운 융기의 흔적들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일종의 기둥 형태로 공간에 직립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석고로 일정한 모듈에 따라 떠낸 박스로 이루어진 것들이 기둥이 되었다. 공간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려는 의지가 감촉된다. 여전히 그 안은 나무의 내부를 뾰족하게, 융기하듯 조각한 형상들로 가득하다. 나무작업을 고스란히 차용한 색채를 머금은 석고는 마치 대리석처럼 마블링의 표면을 간직하고 있어 착시적인 효과 또한 노린다. 초현실적인 효과와 착시적 느낌이 접합되어 시각적인 볼거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음이 하나의 변화로 다가온다. 그러나 여전히 나무의 내부로 들어가 그 안을 매만지고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애써 들으며 이를 밖으로 추출해내는 손길은 여전하다. 그것은 나무라는 물질과 질료덩어리를 한낱 사물로 여기지 않고 이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는 물활론적 사유와 함께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작업을 풀어내는 작가의 마음과 시간의 결정(結晶)이 결국 작업에 다름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나무/자연과 자신의 몸이 만나 써내려간 이야기들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미술평론